니치 브랜드의 의미를 새로 쓰다 – 르 라보(Le La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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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는 그다지 쓸모가 없는 물건이다. 눈에 보이지도, 손에 만져지지도 않기 때문에 실생활을 편리하게 해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화장품처럼 용모를 꾸며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실질적인 편익이 없음에도, 그리고 저렴하지 않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향수를 구매하고 사용한다. 이에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향수는 오감 중 후각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상품이다. 후각은 오감 중 가장 예민한 감각이며, 어쩌면 그래서 향을 고르는 취향은 옷이나 책을 고르는 취향보다도 그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을 짐작하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로 향수 브랜드는 후각 이상의 무언가, 말하자면 취향이라는 제2의 감각을 판매한다는 숙명을 가진다. 그만큼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나만의 특별한 향을 갖고자 하는 욕구가 짙은 상품이 향수이고, 르 라보와 같은 니치 향수는 이에 부합하며 그 존재가치를 지닌다.

 
로고 : 르 라보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량생산대량소비라는 20세기적 산업문화에 염증을 느끼고 지구적인 메인스트림이나 메가트렌드에 편입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미국의 기업 홍보 전문가 마크 펜은 이러한 현상을 ‘마이크로 트렌드’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데, 넓고 얕은 메가트렌드가 아닌 열성적인 틈새 그룹의 작은 트렌드가 시장과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니치(Niche)는 원래 ‘틈새’라는 뜻으로, 기성 제품을 세분화해 그 틈새에 있는 소수의 제한된 고객들의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만든 상품을 뜻한다. 니치 향수는 20세기에도 존재했고, 그 이전에는 원래 향수라는 제품 자체가 소수의 상류계층만이 사용하는 호사품이었다. 그러나 계급의 벽이 깨지고 모든 사람들이 ‘취향’을 가질 수 있게 되면서, 향수 역시 대중화되며 유행도 타게 되었다. 그럼에도 향수의 트렌드를 이끌어가는 이들은 여전히 소수의 애호가들이다. 이들이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대중적인 제품들 대신 좀 더 세세한 취향을 반영하는 니치 향수에 주목하고 애용한다는 것은 곧 소수가 사용하던 니치 브랜드들이 전체 향수 시장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마이크로 트렌드로 자리 잡게 됨을 뜻한다. 나아가 니치 향수는 트렌드를 이끌 뿐 아니라 그 자체로써 높은 수요에 이끌려 주류시장에 점차 편입되었다.

이제 대부분의 니치 브랜드들은 전 세계로 시장규모를 키워나가고 있고, ‘나만 아는 브랜드’를 넘어 ‘유명한 고급 브랜드’의 성격을 띠게 되었기 때문에 니치라는 이름이 조금 무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본래 ‘나만의 향’이라는 목적에 걸맞게 고품질로 소량만 생산되었던 니치 향수가 이제는 다른 향수들과 마찬가지로 브랜드로 평가받고 그 가치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경쟁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미지 출처: http://www.farandwideparis.com
르 라보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2006, 비교적 후발주자로 니치 향수 산업에 발을 내디뎠다. 완제품을 판매하는 다른 브랜드와 달리, 르 라보는 실험실(laboratory)이라는 단어에서 따온 이름에 걸맞게 실험실처럼 꾸며진 매장에서 직접 고른 재료들로 조향을 한 뒤 원하는 라벨을 붙일 수 있는 특별한 브랜드 경험을 판매한다. 니치 향수는 본래 조향사의 전문적인 지식과 장인정신에 기대 제조되지만, 르 라보는 아예 제조과정을 고객에게 오픈함으로써 소수를 넘어 오직 나만을 위한 향수를 만들 수 있는 실험실을 제공한다.

르 라보의 창립자 에두아르 로시에 따르면 이러한 판매 방식은 향수의 신선도나 품질보다는 고객이 조향 과정을 직접 체험하는 과정 자체에 더 의의를 둔 결과물로 만들어졌다.
“레스토랑에 갔는데 음식이 참 맛있어서, ‘이거 왜 이렇게 맛있죠?’라고 물었을 때 셰프가 재료나 향신료들을 보여주고 맛보거나 만져보면 즐겁잖아요. 탐구와 발견이죠.” (Vogue Korea 2012년 11월호 인터뷰)
이미지 출처: 갤러리아 블로그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유럽의 니치 향수들과 달리 매우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르 라보의 실험실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경험의 가치는 향수라는 제품의 특성과 맞아떨어져 시너지 효과를 톡톡히 내고 있다. 이미 수많은 니치 브랜드들이 고급 기성품의 길을 걷고 있고, 소수의 로컬 부티크들만이 니치의 의미를 유지하고 있다. 니치 산업에서 사업 규모의 확대는 브랜드의 성장을 도모하는 반면, 희소성이라는 본래적 가치가 퇴색될 수도 있는 양날의 검과 같은 존재다. 규모 확장을 선택한 기존의 브랜드들은 생산량은 늘리되 조향사의 장인정신과 클래식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브랜드 이미지를 유지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미지 출처: 르 라보 홈페이지
르 라보는 이와 반대로 오히려 고객이 스스로 고유의 향수를 만드는 아마추어리즘적인 경험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희소성을 만들어냈다. 니치 브랜드의 정의를 새롭게 한 것이다. 누군가 대단한 사람이 아닌 내가 직접 만든 나만의 향수라는 고유한 경험은 곧 르 라보라는 브랜드가 가진 고유성이 되었다. 전 세계에 아무리 많은 매장을 두더라도 고객의 경험을 통해 만들어지는 고유성은 퇴색되지 않는다.

르 라보의 설립 취지를 설명하는 메니페스토의 첫머리에서, 이러한 브랜드 경험을 통해 르 라보가 실현하고자 하는 바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We believe that there are too many bottles of perfume and not enough soulful fragrances.(향수는 너무나도 많지만 영혼이 담긴 향수는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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