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을 뒤집는 출판 마케팅, ‘책 안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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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updated on 2월 15th, 2021 at 11:44 오전

책의 위기가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요?

스마트폰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린 2008년 전후였을 겁니다. 4~6인치의 휴대용 단말기기를 터치해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행위에 익숙해질 것이라는 예상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죠. 원하는 책, 영상, 음악, 뉴스까지 다 담을 수 있는 작고 편리한 기기에 모두가 열광했으니까요.

아이폰을 소개하는 스티브잡스 이미지
‘이 오빠가 만든 이거’

맞습니다. 출판 시장은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물리적 서점들은 빠르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한국서점조합연합회의 자료를 참고하면 2009년부터 매년 10%정도씩 서점수가 감소하고 있으며 그 감소율이 조금씩 높아지고 있는 추세라고 합니다.

출판계에서는 위기를 극복하고자 다양한 마케팅을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장 욕구를 자극하는 리커버 에디션과 도서 굿즈, 타 업체와의 콜라보레이션 그리고 스크린 마케팅 등 ‘책을 팔기 위한’ 온갖 종류의 전통적인 마케팅 기법이 총 동원되었죠.

그런데 정작 위기에 빠진 독서 생태계를 구원할 다크호스는 ‘예쁜 굿즈’가 아니었습니다. 구독 비즈니스 모델을 들고 나타난 온라인 콘텐츠 서비스가 급격하게 성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구독 모델’이 새삼 화제가 된 것일까요?

사실 정기 구독은 오래된 비즈니스 모델입니다. 매일 아침 현관 앞에 배달되던 신문, 매달 발송되던 잡지 같은 인쇄 매체가 대표적이죠. 당시 매 달 지불하는 비용의 결과물은 분명했습니다. 방 한켠에 쌓이는 신문지 더미와 잡지들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비록 다 읽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신문지를 깔고 고기를 구워먹는 사진
‘우리집 신문의 용도는 대체로 이러했습니다.’

요즘 주목받는 온라인 구독 모델은 다릅니다. 책이든 잡지든 아무것도 내 손에 쥐어주지 않습니다. 물성이 없는 디지털 콘텐츠를 그저 이용하게 할 뿐이죠. 가상의 책장에 가득하던 3만 권의 책은 구독을 해지하는 순간 모두 사라져 버립니다. 참 허무하죠? 책에 비용을 지불하지만 책을 갖지 못하는 역설. 그런데, 사람들은 이 구독 모델에 열광합니다. 왜 일까요?

 

파는 건 ‘책’이 아닙니다.

‘밀리의 서재’, ‘퍼블리(PUBLY)’, ‘폴인(Fol:in), ‘북저널리즘(Book Journalism)’ 등 구독 비즈니스 모델을 입은 신규 콘텐츠 업체들이 빠르게 독서 시장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월정액 구독 앱 서비스 업체인 ‘밀리의 서재’는 한 달에 9900원의 구독료를 내면 3만 권 가량의 전자책을 무제한으로 읽을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2017년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 누적 회원가입만 22만 건에 달합니다.

일하는 사람들의 콘텐츠 플랫폼을 표방하는 ‘퍼블리’는 월 21,900원에 퍼블리가 자체적으로 보유한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합니다. 현재 월 결제 유료 멤버십 가입자 수는 약 5,500명, 월 재결제율은 85%, 누적 결제고객은 20,000명에 이르렀습니다.

독서 생태계가 되살아나는 것 같아 참 다행이면서도 한편으론 의문점이 가시지 않습니다. 국내 성인의 40%가 1년에 1권의 책도 읽지 않는다는 요즘, 영상도 이미지도 아닌 텍스트 콘텐츠를 얻기 위해 사람들이 지갑을 열다니요. 독서 시장을 이끄는 이 새로운 루키들의 성공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요?

 

저자의 ‘경험’을 팝니다

일잘러의 정리법, 교토의 디테일, 2019 버크셔 헤서웨이 주주총회 스케치 홈페이지 이미지
ⓒ퍼블리 홈페이지

정리 전문가들이 말하는 ‘일잘러의 정리법’
교토 여행에서 발견한 배려의 사례를 나누는 ‘교토의 디테일’
15년차 증권사 애널리스트가 2019년 버크셔 헤서웨이 주주총회를 듣고 정리한 인사이트 리포트 ‘2019 버크셔 헤서웨이 주주총회 스케치’

최근 퍼블리에서 발행된 콘텐츠 중 일부입니다. ‘퍼블리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고유한 콘텐츠들이죠. 퍼블리는 온라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객관적인 정보나 지식으로 집약된 콘텐츠는 제작하지 않습니다. 대신 저자의 ‘경험’이라는 희소 가치에 투자합니다. 예를들어 해외 컨퍼런스나 영화제에 참여할 저자를 직접 모집하여 출장비를 지원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얻어진 저자의 ‘생생한 경험’은 퍼블리의 자산이 됩니다. 독자들은 자신이 모르는 분야에 대한 타인의 지식과 경험을 구독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독서 DNA를 분석해드립니다

‘밀리의 서재’ 웹사이트에서 회원가입을 완료하면 이런 팝업창이 뜹니다.

독서 DNA를 분석해준다는 팝업창
ⓒ밀리의 서재 홈페이지

회원의 독서 DNA를 분석한다는 솔깃한 제안이죠. 아래 책들 중 정말 좋았거나, 가장 먼저 읽고 싶은 책 2권을 선택하면 분석 완료. 이후에는 나의 독서 DNA에 맞는 책을 6권 정도 추천합니다. 그렇게 가상의 서재에 배열된 추천 도서들을 보며, 지난 나의 독서 습관과의 유사점을 찾아보게 됩니다. 나도 미처 몰랐던 나의 독서 취향을 발견하는 순간입니다.

‘퍼블리’는 자체 제작한 고유의 콘텐츠로 승부를 보는 반면, ‘밀리의 서재’는 독특한 큐레이션으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뮤직앱이나 영상 플랫폼에서 도입한 취향 분석 시스템을 독서에 적용한 것입니다. 이런 방식의 큐레이팅은 ‘무엇을 읽을 것인가?’라는 고민의 단계를 축소하여 독자들에게 편리함을 제공합니다. 독서 인구는 꾸준히 감소하지만 공급은 과잉된 책 시장에서 ‘어떻게 팔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읽게 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집중한 결과입니다. 독자들은 결국 데이터 과학에 바탕한 취향 분석 시스템과 독자적인 큐레이팅 서비스에 비용을 지불합니다.

 

전문가의 하이레벨 콘텐츠로 깊이를 더합니다

북저널리즘, 폴인 로고 이미지
ⓒ북저널리즘, 폴인 홈페이지

‘북저널리즘’과 ‘폴인’은 콘텐츠의 전문성, 최신성, 유용성에 방점을 찍습니다. 이들은 각계 전문가의 통찰과 분석이 담긴 하이레벨 콘텐츠로 독자들의 지적 욕구에 호소합니다. 북저널리즘의 홈페이지를 보면 자신들의 콘텐츠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말이죠.

‘전문가의 기자화를 통해 최소 시간에 최상의 지적 경험을 제공합니다.’
‘젊은 혁신가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하이레벨 콘텐츠를 생산합니다.’
‘Worth Reading보다 Must Read를 지향합니다.’

폴인도‘내일의 변화를 읽는다’는 컨셉 아래 각계 전문가의 경험과 인사이트를 콘텐츠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들은 콘텐츠에 깊이를 더함으로써 ‘지식 콘텐츠 플랫폼’으로서의 포지셔닝을 확고하게 합니다. 클릭 한번이면 원하는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화 시대에 지식 콘텐츠 유저들에겐 무엇보다 ‘콘텐츠에 대한 신뢰’가 중요합니다. 이들은 믿을 수 있는 전문가의 정확한 분석과 남다른 통찰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신뢰’를 얻은 브랜드에 독자들은 기꺼이 지갑을 엽니다.

 

구독 서비스, 너와 나의 연결고리

‘이건 우리 안의 소리, 털ㄴ업~’
‘이건 우리 안의 소리, 털ㄴ업~’ ⓒSNL 코리아

저자의 경험, 독자적인 큐레이팅 서비스, 하이레벨 콘텐츠 등 앞서 소개한 콘텐츠 업체들은 각자 고유 브랜드만의 색을 내는 차별화 된 서비스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겐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구독 서비스’를 도입했다는 것이죠.

보통 구독 시스템은 공급자가 수요를 예측하여 안정적인 생산이 가능하다는 장점을 지닙니다. 그렇기에 여러 인쇄 매체에서 선호하던 수익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쇄물을 제작하지 않는 온라인 콘텐츠 업체들의 목적은 조금 다른데 있습니다. 이들은 ‘구독’ 시스템이 독자와 자신들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라고 말합니다. 유료 멤버십에 가입한 구독자들과의 직접 연결을 확보함으로써 독자들이 바라는 콘텐츠는 무엇인지, 어떤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지에 관한 정보를 손쉽게 얻어내는 것이죠. 이들은 유료 멤버십 회원들만을 위한 오프라인 행사를 진행하기도 하는 등 독자들의 브랜드 충성도를 높여갑니다.

책을 출판하고 난 후 독자를 발견하는 기존의 마케팅 방식은 독서 불황의 시대에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읽을거리는 주변에 넘쳐나고, 그 모든 것에 관심을 갖기엔 현대인의 삶은 너무 바쁩니다. 그렇기에 단순히 콘텐츠를 발행하기만 하는 업체들은 독자의 관심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더 이상 ‘책’을 팔려는 노력은 헛수고로 돌아갈 공산이 큽니다. 독자와의 돈독한 관계를 형성하고, 그 관계에서 얻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그들이 원하는 서비스를 이용하게 만드는 것. 구독 비즈니스를 선택한 후발 주자들의 영리한 마케팅이 출판 생태계를 뒤흔든 성공 비결입니다.

글 : 에디터 김지영 (jykim@fastcampus.co.kr)

<참고자료>

– 유료 구독 시대
– “출판 비즈니스 모델” 어떻게 달라지나
– 위기의 출판 생태계… ‘감성’과 ‘가치’를 넣다 책 마케팅은 진화 중
– [미디어 혁신가] ‘저자의 경험’ 파는 퍼블리, 독자 60%가 지갑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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